시간이란 무엇인가

2026. 3. 29. 23:19생각 정리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러간다. 책상위에 달력 몇 장이 넘어갔을 뿐인 것 같은데, 나는 어느새 24살, '20대 중반'이라는 묵직한 꼬리표가 붙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며 맡았던 그 짙고 서늘한 가을 냄새. 삶의 한가운데서도 죽음의 기운이 훅 끼쳐올 때가 있다. 바스라지는 마른 낙엽처럼, 내가 살아 숨 쉬며 살아가는 삶의 매 순간순간 역시 찰나의 스침과 동시에 '과거'라는 이름으로 끝을 맞이하고 있다.

그 흐름의 잔혹함은 내가 열광했던 문화와 우상들의 노화에서 가장 소름 돋게 다가온다. 
상업 영화의 최정점을 찍으며 전 세계에 거대한 자본주의적 제국을 건설한 마블, 그 중심에서 2010년대를 완벽하게 지배했던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결국 수트를 벗고 노년에 접어들었다. '해리 포터'에서 호그와트의 복도를 누비던 삼총사는 물론, 말포이와 네빌 같은 수많은 조연 학생들마저 이제는 주름이 깊게 팬 어른이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레옹'에서 화분을 품에 안고 걷던 위태로운 꼬마 마틸다. '블랙 스완'에서 흑조의 강박에 시달리던 나탈리 포트만은 어느새 결혼을 하고 애까지 낳은 45살 중년의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이어폰을 꽂고 매일같이 듣던 음악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좋은 날'을 부르며 3단 고음으로 국민 여동생이 되었던 고등학생 아이유는 이제 30대의 노련한 아티스트가 되었다. '거짓말', '하루하루', '붉은 노을'을 연달아 히트시키고 명반 『ALIVE』로 아이돌을 넘어선 음악성까지 증명했던 YG의 상징 빅뱅은, 숱한 사건 사고를 거치며 세 명만 남았고, 한 명은 아기 아빠가 됐다. 흰티와 스키니진을 입고 'Gee'와 '소원을 말해봐'를 외치던 소녀시대는 8명이 되었고, 눈웃음을 짓던 티파니가 곧 결혼을 한다.

특히 방탄소년단의 궤적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정말 대단하단 것을 체감한다. 교실 뒷자리에서  엑소 팬과 방탄 팬 여학생들이 소리 지르며 싸우던 게 진짜 엊그제 같은데. 2016년 '피 땀 눈물'로 묘하고 음습한 매력을 뿜어내던 그들은 벌써 군대까지 싹 다 다녀왔다. 음방 1등을 타느니 마느니 하던 우물 안의 논쟁은 우스워졌다. 그들은 이제 광화문을 넘어, 김민재가 뛰고 있는 독일 최고의 명문 구단 바이에른 뮌헨의 알리안츠 아레나, 손흥민 선수가 구장 1호골을 기록한 영국의 토트넘 훗스퍼 스타디움, 심지어 이번 월드컵 경기장이자 세계에서 제일 비싸다는 NFL 로스앤젤레스 소파이 스타디움에서 수만 명을 모아놓고 공연하는 세계적인 거물이 됐다.

나의 힙합 연대기도 시간의 풍파를 직격으로 맞았다. 도끼, 더콰이엇, 빈지노가 뭉친 일리네어 레코즈의 '연결고리'를 들으며 처음 힙합다운 힙합에 심장이 뛰었고, 호기심에 틀었던 쇼미더머니3를 시작으로 4를 거쳐 대한민국 전체를 흔들어 놓았던 시즌 5까지 넋을 잃고 챙겨봤다. 
이센스의 『The Anecdote』, 타블로의 『열꽃』, 비프리의 『Korean Dream』, XXX의 『KYOMI』 같은 명반들을 가사를 곱씹으며 밤새워가며 들었다. 
그런데 쇼미더머니는 시즌 12까지 가더니, 급기야 태국인 현지 래퍼가 결승에 오르는 미친 일이 벌어졌다. 옛날 같으면 "2PM 닉쿤이 윈드밀 돌면서 쇼미 우승했다"는 말이 더 신뢰감 있지 않았을까? 요즘 힙합의 추세도 완전히 달라졌다. 혀가 꼬일 듯한 빠른 래핑이나 내면의 밑바닥을 파고드는 솔직한 가사 대신, 이제는 멜로디컬하고 비트에 묻어가며 너무 많은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 음악들이 주를 이룬다. 그저 머리를 흔들며 뇌를 빼고 리듬을 즐기는 것, 그것이 요즘 힙합의 가장 적합한 표현 방식이 되었다.

이렇게 길고 장황하게 내가 지나온 대중문화의 궤적을 늘어놓은 이유는 단 하나다. 그저 시대가, 그리고 시간이 너무나도 무섭게 변해버렸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시간의 흐름은 그저 TV 속 연예인들의 나이 듦에만 머물지 않는다. 브라운 밖, 내 삶에도 덮치게 된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장례식, 과거와 달리 지금 지인들의 부고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깊이 슬퍼하지 않는다. 

그냥 "그럴 수 있지"라며 덤덤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무뎌지는 내 모습을 볼 때면 서늘한 질문이 뒤따른다. 

만약 내 부모님의 죽음이 닥친다면 어떨까? 늙어가는 부모님의 주름을 체감하고, 내게 하늘 같았던 그들의 존재가 내 곁을 떠나는 날이 온다면. 나는 그때도 이렇게 무뎌진 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외부의 시계는 체감할 틈도 없이 미친 듯이 돈다. 세상은 나를 24살 '성인'이라 부르는데, 내 속은 아직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나를 진정 성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멍하니 시계 초침 소리를 듣는다. 또다시 1초가 사라졌다. 지인의 발인을 지켜보며 멍울졌던 비오던 아침에도, 시계는 똑같이 무심하게 돌았겠지.
진짜 '시간'이란 게 바깥에 존재하긴 하는 걸까? 
사전적 의미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물리적인 우주 어딘가에 흐르는 강물처럼 실재하는 걸까? 
솔직히 말해, 다 착각 같다.우리가 느끼는 이 압도적인 시간의 속도감과 그에 쫓아가지 못하는 내면의 괴리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1600년전의 성직자이자 철학자로 알려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시간조차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며, 하늘과 땅 이전에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그는 시간이 물리적 세상 밖에서 무자비하게 흘러가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고 보았다. 과거, 현재, 미래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존재하는 것은 오직 '과거에 대한 현재', '현재에 대한 현재', '미래에 대한 현재'뿐이다. 
즉, 지나간 시대와 사람들은 내 '기억' 속에, 다가올 두려움은 내 '기대' 속에, 지금 느끼는 상실감은 내 '직관' 속에 깃들어 있다. 
시간은 내 영혼 속에 존재하는 내면적 구조이자 의식이 뻗어가는 '영혼의 확장'인 것이다. 
내 곁을 스쳐간 수많은 인연들과 시대의 변화는 외부의 시간에 휩쓸려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직 나의 의식과 마음의 선율 위에서, ‘기억’이라는 이름의 현재로 여전히 선명하게 살아 숨 쉬고 있을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근대로 넘어와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이 시간을 인식론의 영역으로 완전히 끌어온다. 
칸트에게 시간은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어지러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태어날 때부터 장착하고 있는 '선험적 감성의 직관 형식', 즉 일종의 틀이다. 
칸트는 이를 '빵틀'과 '반죽'에 비유한다. 외부에서 경험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들이 가공되지 않은 '반죽'이라면, 시간은 그 반죽을 '먼저'와 '나중'이라는 순서로 찍어내어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빵틀'인 것이다. 
마치 노란색 안경을 쓰면 온 세상이 노랗게 보이듯, 우리는 '시간'이라는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사건들을 순서대로 인식할 수 있다.
칸트는 "인식이 대상에 맞춰야 한다"는 과거 철학의 상식을 뒤집고, "대상이 인식에 맞춰져야 한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룩했다. 요컨대, 우리는 시간 '속'에서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안경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시간에 대해서 생각을 좀 바꿔야할 것 같다.
나의 내면과 철저히 어긋나 있고 나를 쫓아오는 줄 알았던 야속한 시간은, 결국 세상을 버텨내기 위해 내 영혼이 만들어낸 안경의 도수이자, 내 마음이 연주하는 쓸쓸한 연주일 뿐이니까.
우리는 무자비한 시간 '속'에 던져진 무기력한 피해자가 아니다. 노란 안경을 쓰면 온 세상이 노랗게 보이듯, 우리는 시간이라는 안경을 통해, 무질서한 세계라는 '반죽'에 저마다의 고유한 결을 새겨 넣고 있는 중이다. 세상이 우리를 휩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